홍명보 커리어 및 스페셜 동영상 이야기

 

 

 

한국축구의 역사를 논할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이름이 홍명보 입니다.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 카리스마 홍명보 등등 그에 대한 수식어는 많습니다.

그만큼, 최고의 선수이자,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선수 였습니다.

홍명보는 1990년 ~ 2002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수비의 핵으로 10년넘게 활약하며

엄청난 커리어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선수 였습니다.

 

홍명보 선수의 수비는 피지컬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 수비수가 아니라 상대 공격의 맥을 끓어버리는

지능적인 플레이가 압권이었던 선수 였습니다.

무엇보다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수비라인 및 팀전체를 통솔하는 리더쉽이야 말로

10년넘게 홍명보를 한국대표팀의 부동의 수비수로 존재하게 만든 근원 이었습니다.

 

운동장 전체를 꿰뚫는 폭넓은 시야와 전방으로 연결하는 날카로운 패스, 노력한 경기 운영 능력

적절한 수비위처선정은 홍명보로 하여금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라는 별명을 안겨줬습니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리베로라고 할만큼 공격적인 수비수 이면서 가장 수비적인 공격수...즉

리베로의 전형이었습니다.

 

 

홍명보 스페셜 동영상 이야기

 

 

 

홍명보 커리어 이야기

 

 

홍명보는 고려대 재학시절에 평범한 선수에 불과 했지만 남대식 감독이 스위퍼 재능을 간파하면서

재능이 꽃피게 됩니다. 수비수로서 피지컬과 스피드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탁월한 예측력과 전술 이해력을 바탕으로 공이 가는 길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수비진을 조율했습니다.

 

4백보다는 3백에 특화되었고 일반적인 센터백 보다는 스위퍼 위치에 적합 했습니다.

출신이 미드필더인지라 롱패스가 상당히 정확했고 그로 인해 꽤나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줬으며

같은 포지션에 같은 성향을 지닌 베켄바워와 비견되기도 했습니다. 카리스마와 리더쉽 등으로 팀동료 사이에서도

항상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1990년 부터 국가대표 수비수로 활동하면서 4개 대회 연속으로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K리그 에서는 1992년에 데뷔하게 되는, 데뷔시즌 부터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소속팀인 포항도 우승을 시켰습니다. 처음 시즌부터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됐던 홍명보였습니다.

등장부터가 정말 화려 했습니다.

 

홍명보 커리어 이야기의 시작은 1994년 미국 월드컵 이었습니다.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와 함께 같은조에 편성되어 16강 진출을 노렸습니다.

첫경기 스페인에서는 한국의 대 선전으로 2:2 무승부를 키록하며 파란을 일으킵니다.

종료 5분을 남기고 홍명보 선수의 프리킥골과 서정원 선수의 극적인 동점골이 이어지면서 16강 진출에

희망을 이어가면서 2차전 볼리비아 전에서는 수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0-0으로 비깁니다.

 

마지막 독일과의 경기

전반에는 3골을 내주고 경기가 기울어 가던 시점에 체력이 빠진 독일을 상대로 한국은 막판 저력을 발휘합니다.

황선홍 선수의 첫골이 터지고 나더 드디어 홍명보 선수의 멋진 중거리 슛으로 3-2까지 추격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기회에서 골을 연결시키지 못하면서 2무1패로 탈락합니다.

그러니 이대회 홍명보 선수의 2골으 한국축구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고 홍명보 선수는 영웅이 되어 귀국 합니다.

 

월드컵이 끝나자 마자, 일본과 유럽의 명문 클럽팀들까지 홍명보에게 스카웃제의를 합니다.

그러나 소속팀의 반대 등으로 아쉽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야, 유럽진출이 일반화된 현상이지만, 당시에는 소속팀이나 한국 자체적으로 해외진출을 막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결국은 한국에 남게 됩니다.

만약 이시기에 홍명보가 유럽에서 활약했다면 지금의 명성은 더 높아졌을거라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한국에서 활약하던 홍선수는 주위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J리그 벨마레로 진출 합니다.

그리고 명언을 한다디 남기게 되죠.

" 내몸은 일본에 있지만 영혼은 한국에 있다" ㅋㅋㅋ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선수임에 틀림 없습니다.

벨마레 데뷔전은 스위퍼가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 합니다.

 

그러나 보복행위로서 백태클이 들어오자 밟아 버리고.. 레드카드를 받습니다.

당시 벨마레에는 일본대표 로페스와 나카다가 있어, 레베로 홍명보가 아닌, 수비의 구심점을 맡길 바랬고

자연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98년 팀 재정이 악화되면서 자구책으로 고액연봉자들 팔기 시작했고 홍명보도 트레이드 시장에 나옵니다.

 

홍명보가 일본 축구팬에게도 커다란 존경과 애정을 사는 이유도 이당시 활약상 때문이었습니다.

홍명보는 2000년에 가시와 레이솔팀의 주장까지 맡게 됩니다.

그만큼 홍명보 만큼은 많은 신뢰를 받았으며, 엄청난 존재감이었습니다.

1999년 소속팀의 컵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제이리그에서도 당당히

베스 11에 선정 됩니다.

 

90년대 홍명보는 아시아 전체에서 손꼽히는 수비수중 한 명이었으며 아시아의 리베로로 불렸습니다.

일본게에 있어서 홍명보는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넘어야만 했던 벽이었습니다.

홍명보가 출장했던 축구 한일전에서 일본이 이긴적은 1993년... 딱 한번이었습니다.

일본의 많은 축구 관계자들이 항상 홍명보만 없었으면 .. 하고 탄식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이렇기에.. 우리에게는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홍명보 선수는 평상시에는 조용하면서도 쿨하게 보이는 이미지인데, 경기장에서는 달라집니다.

수비위치선정이 뛰어났고, 시야가 넓었습니다. 근성있게 수비했으며, 특히 세련된 패스감각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강한 정신력, 리더쉽, 조율능력, 한마디로 팀의 기둥과도 같은 선수 였습니다.

요즘도 인터뷰 할때면 홍명보는 정신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마음가짐의 중요성은 몇번이나

강조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흔히 홍명보를 표현할때 리베로라는 포지션을 많이 떠올리지만, 실제로 대표팀 시합에서는 수비에 치중하거나

공격에 가담한다고 해도 제한적인 경우 - 전방에서 워낙 공격이 안풀리니 어쩔 수 없니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홍명보 스페셜 국가대표 이야기

 

16세 이하 대표팀부터 월드컵 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비수 였고, 공격의 황선홍과 함께

9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였습니다.

1994년에도 월드컵때는 수비수로서 2골을 넣었었고, 1998년 월드컵 때에도 수비의 중심과 핵으로서

참여했습니다. 거기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시아 월드컵 최다출전경기 기록 보유자 (16경기 )

 

국가대표 생활로서 커리어 정점을 찍었던 그대회... 한국 사람이라면 다기억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었습니다.

본선만 나가면 1승조차 하기 어려운 한국을 수비와 팀 구심점 역할을 하며 기적과도 같은 4강까지 진출시키고

브론즈볼 수상하면서 , 이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한국 선수 가운데 A매치 최다출전 ( 135경기 )과 유일한 월드컵 4회 연속 참가 기록을 가졌습니다.

 

 

홍명보 스페셜 마지막 이야기

 

홍명보 선수는 낳은 최고의 축구스타였고,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수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해외진출 입니다.

그리고 바로 홍명보 선수에게 영입의사를 밝혔던 팀이 바로셀로나와 AC밀란 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만약 바르샤나 AC밀란을 갔었다면, 어쪄면 말디니와 함께 AC밀란을

책임지는 수비수로서 더 높은 명성을 쌓았일지도 모를 입니다. 그러기에도 충분한 실력과

인성,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선수였으니까요.

아시아가 아닌 더큰 무대에서 못뛰었떤게 너무 아쉬운 부분입니다.

 

한국 축구는 홍명보 은퇴 이후 계속적으로 고질적인 수비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항상 수비적인 재능을 보이면 제2의 홍명보라고 하는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는 있찌만,

은퇴이후, 10년동안 반짝하고 들어가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홍명보 못지 않은 제대로된 수비수를 발굴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은 감독직을 수행했지만, 현역생활부터 꿈이라고 밝혀온 행정가의 길을 꼭 갔으면 합니다.

 

Posted by 너네통닭
,